[시민 시인의 얼굴] 눈물의 왕자: 박용래, 「샘터」
[시민 시인의 얼굴] 눈물의 왕자: 박용래, 「샘터」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3.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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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샘바닥에

걸린 하현(下弦)

얼음을 뜨네

살얼음 속에

동동 비치는 두부며

콩나물

삼십 원어치 아침

동전(銅錢) 몇 닢의 출범(出帆)

―지느러미의 무게

구숫한 하루

아깃한 하루

쪽박으로

뜨네.

-박용래, 「샘터」

눈물의 왕자

오늘날 우리 시를 이끄는 힘은 입신출세주의나 교양주의에서 발원하지 않았습니다. 김수영은 전자를 모리배라 했으며 후자를 딜레탕트(dilettante)라 일갈했습니다. 시를 빙자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는 꼴을, 타고난 태생에 만족해 시를 여기로 여기는 거드름을 그냥 보지 못했지요. 그래서 ‘시여, 침을 뱉어라’ 유언처럼 남겼지요. 김종삼과 박용래는 쌍생아처럼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닮았습니다. 박용래를 전통 시의 후예로 낙인찍으려 했지만, 김종삼을 서구 미학의 협소한 감옥에 가두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광장 중심에서 벗어나 외진 곳 언저리에서 살다 적멸하였으니 우리 시의 시민성을 제대로 구가하였습니다.

시 「샘터」에서 김종삼 시 「장편 2」를 읽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청계천변 십 전(錢) 균일상(均一床) 밥집문턱엔/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이끌고 와 서 있었다/주인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태연하였다//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십 전(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존엄을 이처럼 극명하게 드러낼 수가. 박용래 또한 생활의 엄중함을 이 시에 담습니다. 하현달이 뜨는 이른 새벽녘부터 삶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살얼음 같은 세월입니다. 두부며 콩나물 삼십 원에 의지한 아침을 또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출범!’ 바다로 나가는 어부처럼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될 하루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인간 삶의 근거를 박용래도 보여 주지 않는가요.

박용래가 1970년 현대시 작품상 1회를, 김종삼이 차례로 2회를 수상합니다. 두 사람이 시의 동행자라는 걸 알아본 모양입니다. 박용래는 ‘눈물의 왕자’입니다 간호사였던 아내가 출근해도, 어린 새들이 지저귀어도, 해가 져도 울고불고했답니다. 이것을 전통적 서정이라 한다면 무슨 한이 그리 많은가요? 홍래(泓來) 누이가 젊어 죽은 사연이 있기는 하지만 김소월을 쉽게 민요 속에 가두듯 한 건 아닌지요. 그의 ‘눈물’은 한낱 멜랑꼴리 우울 포즈가 아닙니다. 1920년대 시인들이 억지로 비탄에 빠진 슬픈 척이 아니니까요. 그의 시는 늘 사물을 응시하며 서러운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게 우리 공동체 밑바닥에 흐르는 꼭 이루고자 하는 비원의 물줄기가 아니겠습니까.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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