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앤 시네마-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 살인마, 현실과 망상 사이 사투를 벌이다
[북 앤 시네마-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 살인마, 현실과 망상 사이 사투를 벌이다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7.09.06 1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왼쪽)이 원신연 감독의 영화로 재구성됐다

[독서신문] ‘세븐 데이즈’, ‘용의자’로 한국 영화계의 장르 귀재로 자리매김한 원신연 감독. 그리고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박학다식함과 유머를 겸비한 모습으로 호감을 산 소설가 김영하. 두 사람이 만났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과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들고. 

원신연 감독이 연출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9월 6일 개봉)’은 김영하 작가의 4년 전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원작으로 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그렸고, 정교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각각의 스토리는 매력 넘치는 흡인력을 자랑한다. 

원작 소설과 영화는 큰 맥락에서 같이 가지만, 주요한 설정이 다르다. 원신연 감독은 40분 만에 소설을 독파하고 영화화를 결심했다. 차기작을 준비 중이던 그는 심리적인 묘사나 드라마적 요소가 강한 이야기를 찾던 중 이 책을 발견했고, 원작의 장르적인 재미, 깊이 있는 주제와 빠른 호흡, 거듭되는 반전, 서스펜스와 결합된 유머까지 고루 갖춘 소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한다. 

원신연 감독 연출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작가 원작 『살인자의 기억법』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병수 역의 설경구

다만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을 제대로 설득하기 위해 소설과는 다른 설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크게 두 가지 변화를 줬다. 먼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마 병수(설경구 분)가 살인하는 이유를 바꿨다. 소설 속 병수는 ‘더 완벽한 쾌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목표를 안고 살인을 저지른다. 반면, 영화 속 병수는 ‘세상에 널린 죽어 마땅한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청소하기 위함’이라 생각하며 살인을 한다. 감독은 관객들이 병수를 이해하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하려고 이런 설정을 도입했다. 이에 대해 김영하 작가는 “최대한 소설과 다르게 표현되길 바랐다. 소설과 영화는 비슷한 아이디어를 공유한 전혀 다른 창작물이다”라며 원 감독의 뜻을 존중했다. 

두 번째는, 병수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변화다. 소설에서 병수가 새로운 연쇄살인범이라 의심하는 박주태는 땅을 보러 다니며 사냥을 즐기는 사냥꾼으로, 뱀의 눈을 가진 차갑고 냉혹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태주(김남길 분)는 경찰서 순경이다. 병수는 우연히 접촉사고로 만난 태주에게서 자신과 같은 눈빛을 발견하고 직감적으로 그가 연쇄살인범이라 확신한다. 태주도 병수가 연쇄살인범임을 눈치채고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도록 병수의 딸 은희(김설현 분)에게 접근한다. 

병수의 눈에 걸려든 태주 역의 김남길

이 과정에서 병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 순경인 태주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심지어 병수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계속 끊기기까지 한다. 이로 인해 관객들은 태주가 진짜 새로운 연쇄살인범인지, 병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끝까지 헷갈려 한다. 이 부분이 영화의 묘미로 작용하길 바랐던 감독은 신경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알츠하이머 증상에 디테일과 정확성을 보강하고, 현실과 망상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병수의 모습을 잡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체중 조절을 마다하지 않았던 배우들의 열연도 크게 작용했다. 먼저, 설경구는 “분장의 완성은 배우가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바짝 마른 병수가 되어 나타났다. 그는 촬영 중간에도 탄수화물을 멀리했고, 매일 촬영 들어가기 직전 2시간씩 1만 개의 줄넘기를 하며 체중 유지에 힘썼다. 그뿐만 아니라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젊은 시절부터 17년 후 알츠하이머에 걸린 50대 후반의 모습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소화해냈다. 이를 본 김영하 작가는 “설경구의 연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연기에 임하는 결기, 독기가 느껴진다. 소설은 소시오패스 같은 인물이지만 영화는 감정이 있고 딸에 대한 부성애가 있는 인물인데, 설경구는 영화가 요구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주 역을 맡은 김남길 또한, 살을 찌웠을 때 섬뜩함이 배가되는 얼굴이라고 생각한 감독의 주문에 따라 설경구와는 정반대로 14kg이나 몸을 불리는 변신을 감행했다. 미세한 줄타기를 하며 병수와 관객을 헷갈리게 만들어야 하는 역할답게, 그는 섬뜩해진 인상 속 찰나의 순간 미묘하게 변하는 태주의 표정을 노련하게 살려냈다. 

병수의 하나뿐인 딸 은희 역의 김설현

영화와 소설은 현재 서로의 강점을 발휘해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있다. 소설의 정교한 설계, 영화의 숨 막히는 서스펜스. 두 작품은 닮은 듯 달라 매력적이다. 책 속 구절을 인용한다. 독자들의 흥미도, 관객들의 흥미도 자극하길 바란다. 

“은희 엄마가 내 마지막 제물이었다. 그녀를 땅에 묻고 돌아오던 길에 차가 나무를 들이받고 전복됐다. 경찰은 내가 과속을 하다 커브길에서 중심을 잃었다고 말했다. 두 번의 뇌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약 기운 탓이라 생각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한없이 평안하여 기이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만 들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을 느꼈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 애들이 웃는 소리, 여자들이 조잘대는 소리, 다 싫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평화. 끝없이 들끓기만 하던 마음이 정상인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갑자기 귀가 멀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마음에 찾아온 이 돌연한 정적과 평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사고 때의 충격 때문이든 의사의 메스질 때문이든 내 뇌에서 뭔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정윤 기자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176쪽 | 10,000원

* 이 기사는 격주간 독서신문 1631호 (2017년 9월 14일자)에 실렸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