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신라 말기 최치원의 답답함 달래준 해운대 비경
[책 속 명문장] 신라 말기 최치원의 답답함 달래준 해운대 비경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7.09.30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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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해수욕장 @Dann19L(shutterstock)

[독서신문] 조선시대에 해운대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고 고기잡이배가 드나들며 백사장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해운대는 일본인들이 온천을 발굴하고 여관을 세우면서 점차 근대 관광지로 변모했다.

지금은 동백섬 일대를 넘어 근방을 모두 해운대라 부른다. 하지만 해운대는 원래 푸른 바다를 바라본 기암절벽 위에 소나무가 울창한 대(臺)를 일컫는 말이다. (중략)

해운대는 관광 명소이거니와 여행의 인문학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장소이다. 동백섬 등대광장의 축대 옆에는 신라시대 대학자 최치원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 회색의 거친 암반에 ‘해운대(海雲臺)’ 세 글자를 새긴 석각(부산시 기념물 45호)이다.

실은 이곳이 해운대의 발상지라 할 수 있다. ‘해운’은 최치원의 자(字)이다. 오랜 세월 해풍과 강우에 암면이 파이고 떨어져 나갔어도 석각은 영락없는 최치원의 얼굴, 고뇌에 찬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은 최치원을 흠모하는 고려와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신라 말기에 나라 망하는 꼴을 바라봐야 하는 최치원의 답답한 심정을 달래준 것은 유람이었다. 때마침 만경창파의 해운대가 비경을 선사하면서 잠시나마 고뇌와 울분을 잊게 했을 터이다. 해운대 일대가 관광도시가 된 역사적 연원을 따져보면 이로부터 출발한다.

해운대를 찾는 관광객들은 모두 최치원의 후예인 셈이다. 겉으로는 즐겁게 떠들고 노는 것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고민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해운대에 왔다면 최치원이 그러했듯 망망대해에 그 고심을 잠시라도 풀어놔야 한다. 말세의 절망조차 잊게 한 해운대였다. 그깟 인간사 고민 정도야 확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은가. <17~19쪽 요약> / 정리=이정윤 기자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부산』
유승훈 지음 | 유승훈·shutterstock 사진 | 가지 펴냄 | 264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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